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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리와인더 - 1부14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07:34 793회 0건
*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4장


살아오면서 그렇게까지 대답할 말이 궁색했던 순간은 몇 번 없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처음 아니었을까.
대답을 하고 말고의 문제와는 별개로 인간의 두뇌는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가기에, 그 순간에도 현아 씨에게 사실을 고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잡아떼느냐의 두 기로에서 내 머릿 속은 선택을 망설이고 있었다.

"정액 냄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 여자 입에서 그런 말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에 앞서 뒤처리에 세심한 신경을 쓰지 못한 부주의를 가장 먼저 탓하고 있는 내 약삭빠름이 왠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그게..."

만약 아니라고 잡아뗀다면 뭐라고 대꾸를 하는게 좋을까?
사실 병원 옆 돌담에 나있는 밤꽃 냄새가 창문으로 타고 들어온거라고 하면 되려나?

아니면 미친 척하고 서연이가 오기도 전에 혼자 딸딸이 친건데 냄새가 덜 빠진 거라고 변명을 해볼까?
그것도 아니면 현아 씨 코가 이상한거 아니냐며 뻔뻔하게 철판을 깔아봐?

"그러니까...."

하지만 현아 씨의 웃음기 가득한 두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는 직감으로 깨닫고 말았다.
그 어떤 알량한 변명이나 억지를 갖다붙이더라도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임을.

그녀는 이미 확신에 가득 차있었고, 내게는 그 확신을 뒤집어 줄 만한 완벽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아닌 여자친구의 언니에게 "내가 당신 동생을 놔두고 다른 여자랑 실컷 뒹굴었소."하고 곧이 곧대로 실토를 한다는건 완전 미친 짓이 아닐까?

"흐음~"

현아 씨의 눈썹 모양이 초승달처럼 둥글게 휘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 장난기 넘치게 웃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 문제 앞에서 그런 장난스런 태도로 대처할 수 있는 걸까?

"좋아요. 지금은 대답을 듣지 않을게요. 그게 더 재밌을 것 같으니까."

그 장난기 어린 웃음 뒤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는지 감히 내가 어떻게 상상이나 했을까.
마치 "한번 살려준다"는 듯한 어감과 함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이 병실 안으로 한가득 흘러들어왔다.

"우선 환기부터 시켜요. 현주는 보기보다 순진하니까 어쩌면 모를 수도 있겠지만... 킥킥."
"저기.. 현아 씨."
"그래도 내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줘야 할 거에요. 조만간."

어쩌면 이 순간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뗐다면 그 후의 일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그 가정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오지는 않았기에.

"두 사람 무슨 얘기 하고 있어?"

현주가 병실로 돌아오자, 나는 마치 가시방석 위라도 되는 듯이 쭈뻣거리며 침대 위에 어색하게 걸터 앉았다.

현주면 현주, 현아 씨면 현아 씨. 둘 중 하나를 제대로 상대하기에도 벅찬 이 상황에서 그림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긴장으로 입 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현아 씨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즐거운 듯, 내게 현주가 모르도록 윙크를 찡긋거리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척을 한다.

"우리? 재밌는 얘기 하고 있었지~"
"재밌는? 뭔데?"
"있어, 그런게. 순수한 너는 아직 잘 모르는 어른들만의 이야기? 호호호~~"
"뭐야. 언니 설마 야한 얘기하고 있었어?"
"미친 년... 넌 하나 뿐인 언니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니?"
"언니가 그런 너구리 같은 표정을 지을 때마다 야한 얘기를 하니까 그렇지."

신기하게도 그 순간 상황의 심각성을 잊고 풋 하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쩌면 우발적인 웃음으로써 어물쩍 분위기를 쇄신시켜보려는 내 얄팍한 본능은 아니었을까? 현주가 나를 곁눈으로 째려보면서 핀잔을 주었다.

"웃지 마."
"으응."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인지 찍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까 그 후배 누구야?"
"누구긴. 학교 후배지."
"말장난 하지 말고 얼른."
"저, 정말이라니까? 그 외에 또 뭐가 있다고 그래."
"그냥 학교 후배라면서 혼자 병문안도 오고 사과도 이렇게 이쁘게 썰어주고 가나봐?"
"친하니까 그렇지."
"흥, 뭐 얼마나 친하길래."

현아 씨와 마찬가지로 현주 또한 서연이를 아니꼽게 생각하며 이것저것을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서연이의 존재에 대해 물어오는 현주 씨와 현아의 태도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극명하게 달랐다. 현아 씨는 이미 뭔가를 눈치챘다는 태도로 나를 가지고 놀았지만, 현주는 그저 사소한 질투에서 우러나오는 의심의 몇 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역시 현주는 내가 바람을 피웠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좀 불편했다. 그리고 좀 다른 의미에서 내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게 있다면 역시 현아 씨의 태도였다. 그녀는 내가 현주에게 서연이에 대한 변명을 하는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면서, 이따금씩 자신의 동생이 보지 않을 때 내게 짖궂은 미소를 씨익 날리곤 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뭐어? 학회장이라구? 그 후배가? 쳇. 어쩐지... 첫 인상이 맘에 들지 않더라니."

서연이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주니 현주가 잔뜩 꼬인 말투로 서연이에 대한 안좋은 인상을 대놓고 드러냈다.
도대체 학회장인거랑 첫 인상이 맘에 들지 않는게 무슨 상관인가 싶어 반문했더니 대답도 가관이었다.

"학회장이니까 야외 행사도 그 여자가 계획했다는거 아니야. 엠티면 엠티답게 얌전히 실내에서 술이나 마실 것이지 괜히 밖에 사람들 데려나가서 노니까 사람이 다치는 거잖아. 따지고 보면 그 여자 때문에 오빠가 다친 거나 다름없네. 참 나, 근데 무슨 낯으로 병문안을 왔대?"
"......."

내가 다친 이유를 야외 행사에서의 단순한 안전사고로 알고 있는 현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있었겠지만, 아마 서연이가 그렇게 예쁘게 생긴 여자 후배만 아니었더라도 현주가 그런 억지스런 이유를 갖다붙이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현주가 지적한 부분 때문에 요새 서연이가 학교에서 많은 고초를 겪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어줍잖은 측은지심을 발휘해서 서연이를 옹호했다가 나는 괜히 한소리를 더 듣고 말았다.

"걔가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런 것도 아닌데 뭐..."
"뭐라구? 지금 오빠 그 여자 편 드는 거야?"
"아, 아니."

어디선가 주워들은 기억으로는 절대 여자친구 앞에서 다른 여자의 편을 들지 말라고 했다.
남자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10가지의 금기 중 하나 였나...? 뭐 여튼 그랬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킥킥."
"언니는 뭐가 자꾸 그렇게 웃겨?"
"아니~ 그냥 귀여워서. 부럽다 부러워. 나도 이제는 한 남자에게 얌전히 정착해서 저런 달달함이나 즐겨볼까?"
"흥... 제발 좀 그래라."

현주는 꽤 늦은 시간까지 병실에 머물다가 결국 언니의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내로 퇴원할 생각이라고 말해주자 현주는 퇴원하는 날에 맞추어 내 자취방에 놀러오겠다고 했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현주가 한번 더 잠시 병실을 비웠을 때, 현아 씨는 문득 휴대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도저히 현아 씨와 단 둘이 대화를 이어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으므로, 나는 현아 씨가 다른 곳에다 전화를 거는 모습이 내심으로 반가웠다.

하지만, 곧이어 선반 위의 내 휴대폰이 징징거리며 울리는 것을 보고 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걸 알았다. 그녀는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오호~ 지난 번에 내가 줬던 번호를 저장하긴 했나봐요?"

현아 씨는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로 허락도 없이 내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그녀의 번호를 불쑥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쪽지에다 적어준 번호는 예전에 휴대폰에 입력해둔 상태였지만 설마하니 그녀가 내 연락처를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동생 폰을 좀 훔쳐봤죠."
"현아 씨, 나한테 왜 이러는 거에요?"
"왜 이러다뇨?"
"말 그대로에요. 왜 우리가 서로 연락처를 알고 있어야 하는 거에요?"
"동생 남친 연락처 좀 알고 있으면 안되나요?"
"평범한 의도로 이러는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니까 그렇죠."

내가 핵심을 짚었는지 현아 씨는 다시 아까의 그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나는 현아 씨를 처음 보았을 때 그 고양이 같은 웃음이 그녀의 동생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짓는 웃음의 느낌은 그녀의 동생과는 너무도 달랐다.

"맞아요. 평범한 건 아니죠. 하지만 성진 씨가 뭘 생각하든 그것도 답은 아닐 거에요. 난 그냥 성진 씨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뿐이니까. 현주 모르게 말이에요."
"할 얘기라구요....?"
"그래요~ 현주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성진 씨가 "좋은 남자"라면 난 그걸 확인해 볼 의무가 있거든요. 언니로서."

무슨 얘기일까?

"오늘 성진 씨를 보니 어쩌면 성진 씨는 현주가 찾아 헤매왔던 그런 남자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재밌는건 사실이에요. 현주는 이런 내 기분 이해 못하겠지만... 호호호~"
"무슨 뜻이에요?"
"아마 알게 될 거에요. 언제 한번 연락할테니까 내 번호 지우지 말구요~"

현아 씨가 내게 연락처를 남겼다는 사실을 현주는 모르고 있는게 분명했다. 현주가 다시 병실로 돌아오자 현아 씨는 이야기를 멈추었고, 그 뒤로 두 사람이 돌아갈 때까지 현아 씨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 현아 씨의 그 장난기 어린 웃음을 마지막으로 본 것 같았지만 끝내 그 의미는 알 수 없었다.


*


"선배."

오늘은 뭔가 특별한 날이었나보다. 현주와 현아 씨 자매가 마지막 문병객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 유성아."

원래 내게 친구가 좀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내 예전의 찌질한 모습을 아는 친구가 오늘 하루 동안의 내 모습을 봤다면 아마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하루 동안 무려 네 명의 여자가 내게 병문안을 오다니. 그것도 평범한 여자들도 아니고 한명 한명이 다 한가닥씩 할 것 같은 미모의 여자들로만 말이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문병 오기엔 너무 늦은 시간 같은데."
"피곤하세요? 그럼 그냥 돌아가구요."
"아, 아니야. 그런건 아냐."

유성이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담담하고 무뚝뚝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이런 늦은 밤에 내 병실로 찾아왔다는게 내게는 무척 특별한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누가 여기 있다가 갔나 보네요."

유성이가 선반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빈 주스병들을 흘끗 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현주가 있었을 때 유성이가 왔더라면 엎친데 덮친격이 되었겠구나. 정말 다행이다....
유성이까지 난입해서 3자 대면을 하게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으응."

이상하게도 "여자친구가 왔었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서연이한테도 느끼지 못했던 이런 조심스러운 기분을 왜 유성이에게 느끼는 걸까?

계곡에서의 사고가 있고난 후로 병문안을 오는 유성이를 볼 때마다 나는 여자인 유성이 쪽이 아무래도 더 부끄럽지 않을까 매번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더 조심스러워지는 쪽은 매번 나였다. 나도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늘 같이 왔던 서연이도 없었기에 더 쭈뻣거리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아무 얘기나 던졌다.

"오, 오늘 뭐 했어?"

젠장. 아빠도 아니고 물어도 하필 이딴걸 묻고 있냐.

"그냥 수업 듣고... 드라이브 좀 하구요."
"오토바이?"
"네."

유성이에게 바이크 타는게 어떤 의미인지 대충 알고 있는 나는 "드라이브"라는 말만 듣고도 쉽게 짐작을 할 수 있었지만, 사실 내가 아니라도 지금은 누구든지 유성이를 보면 그걸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유성이의 차림새가 누가 봐도 라이더임을 확신할 수 있는 바이크 슈트 차림이었던 것이다.

"오늘 스타일 죽이네."
"그냥 가끔 입는 거에요."

옷차림에 대한 남성의 평가가 유성이에겐 다소 생소한 일임이 틀림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는 모습이었지만 유성이가 시선을 옆이나 아래로 슬쩍 피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수줍다는 감정 표현을 의미하는 것임을 나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비록 유성이를 오래 지켜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계곡에서의 그 경험이 왠지 시간에 비해 비약적인 속도로 우리 둘을 가깝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그 "가깝다"는 의미가 나와 그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같은 의미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만의 어떤 유대를 심어놓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그 특별한 느낌이 나를 들뜨게 했다.

"엄청 섹시한데?"
"어딜 봐서요?"

그런 표현 또한 무척 이질적으로 들렸나보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한차례 쓱 훑어내리는 유성이의 시선. 하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감상을 말한 것이었다.

상하의 구분이 없는 미끈한 라인의 슈트는 유성이의 전신을 감싸듯이 덮고 있었다. 여성용 바이크 슈트가 원래 저렇게 섹시한건지 아니면 유성이의 슈트가 특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 군데군데의 굴곡을 아찔하게 드러내는 타이트한 디자인의 슈트가 굉장히 세련되면서도 섹시해보였다.

이렇게 보니 유성이도 몸매가 상당히 좋구나...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얼굴은 서연이가 한 수 앞서지만 몸매는 유성이가 서연이에게 꿀릴 이유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가슴은 유성이가 조금 더 큰 것 같은데. 슈트가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유성이의 가슴 부근에서 그녀만의 볼륨이 엿보였다. 저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새하얀 맨가슴이 내 가슴에 닿았기도 했지.... 진짜 짜릿했어.

"아, 아니... 이게 아니지."

순간 망상이 이상한 곳으로 새어버리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나는 잠깐 상상을 접었다. 이런 상상은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실컷 해도 되니까.

"그, 그냥... 멋져. 세련되보이고."
""멋지고 세련"된게 "섹시하다"는 거랑 같은 의미인 거에요? 섹시하다는건 성적 매력을 포함하는 표현인 줄 알았는데..."
"포함하는거 맞아. 너 지금 완전 섹시한 여자로 보여."

병원에 있는 동안 유성이에 대해 이따금씩 생각하곤 했다. 그녀에게 앞으로 최대한 많은 여성적인 부분에 대한 칭찬을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단순히 "예쁘다"라는 말로는, 유성이가 살아온 20년의 삶 동안 억눌러졌던 그녀의 숨겨진 여성성을 끄집어내는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유성이는 결코 얼굴이 못난 편이 아니었기에 그녀도 살아오면서 주변인으로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종종 듣기는 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칭찬도 듣다보면 무덤덤해지지 않던가. 나는 좀 더 다른 방식과 표현으로 그 아이의 내면의 여성성을 자극해주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어쩌면 "섹시하다"는 표현 또한 그런 마음의 발로에서 나타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선배에게 섹시한 여자라는건 어떤 여자에요? 서연 선배 같은 여자인가요?"
"서연이?"

약간 난감한 질문이다.
서연이... 물론 서연이가 섹시하긴 하지.
하지만 굳이 서연이를 표본으로 들어 유성이의 매력을 칭찬하고 싶진 않은데.

"뭐 서연이도 섹시하지 않은건 아니지만... 너하고 서연이는 달라. 예쁘다고 해서 다 똑같이 생긴게 아닌 것처럼 섹시하다는 매력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타나는 거거든. 그러니까 굳이 서연이랑 비교하려고 하진 않아도 돼."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문득 낮에 서연이랑 섹스를 할 때 머릿 속으로 들었던 의문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서연이를 닮고 싶어하는 유성이는 서연이의 섹스할 때 모습까지도 닮고 싶어할까?
아니, 그 이전에 서연이의 그런 모습을 알게 되면 유성이는 어떤 생각을 할까?

젠장, 또 망상이 이상한 곳으로 흐르는 것 같다.

"그, 그래. 학교에서는 뭐 별 일 없고?"

머릿 속에 떠오르는 서연이의 알몸을 지우려고 아무 얘기나 끄집어 낸건데, 뜻밖에도 유성이의 표정이 약간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은요."
"응?"

말을 꺼낼지 말지 머뭇거리는 유성이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차라리 말 끝을 흐리거나 시선을 피할지언정 유성이가 그렇게 머뭇거리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에 나는 혹시 무슨 불미스런 문제라도 생긴건 아닌지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받아냈어요."
"응? 뭐라구?"
"사과 받아냈어요."
"사과?"

워낙 뜬금이 없었기에 처음엔 무슨 누구에게서 과일이라도 받았다는 의미인줄 알았다. 하지만 한마디를 더 듣고 나서야 그게 아니란걸 알았다.

"임지환 그 놈에게서 사과 받아냈다구요."
"뭐라구?"

어찌나 놀랐는지 매트리스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나의 표정에 유성이는 약간 머뭇거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녀는 왠지 이 사태를 내게 설명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오늘 학교에서 사과 받아냈어요."

나는 유성이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지환이 그 새끼가 순순히 사과를 했다는 내용 자체도 덥썩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만약 지환이가 스스로의 행동에 두려움을 느껴서 처벌을 피하고자 사과를 했다는 뜻이라면 사과를 "받아냈어요"가 아니라 "받았어요"라고 표현했어야 옳다.

그리고 유성이도 내가 그 점을 인식했다는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머릿 속에 유성이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네가?"
"......."

행동을 서술하는 동사가 생략되었지만 유성이는 내 질문의 요지를 알아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성이.

"손 좀 봐줬어요...."
"......."

이번엔 내가 할 말을 잃는다.
뭘 어떻게 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성이의 어감으로 짐작하건대 그녀가 한 행동에 비해서 지나치게 생략된 서술을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우선 놀라는건 두 번째로 하기로 하고 유성이의 몸 상태부터 살펴보았다. 다행히 어딘가 다친 구석이나 기미는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이제 놀랄 차례다.

"뭐, 뭘 어떻게 했는데....?"
"그냥... 그런게 있어요."

일부러 설명을 기피하는 것이 너무도 뻔히 보인다. 하지만 유성이는 마치 그에 대한 재질문의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서둘러 뒷내용을 서술해나갔다.

"아무튼, 그 자식도 자기가 한 짓이 무서웠는지 제발 신고만은 하지 말라고 사정하던걸요. 미안하다며, 다시는 눈에 띄지 않겠다고.... 이번 학기는 중도 휴학하겠대요. 솔직히 진심 어린 사과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 사과를 할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간 큰 짓을 하지도 않았겠죠."
"그, 그래서 넌 어떻게 했는데?"
"무릎 꿇고 빌라고... 그리고 서연 선배나 성진 선배한테 다시 허튼 수작 부리면 죽여버린다고.... 그냥 뭐... 그러고 나서 증거사진 좀 찍고, 각서 좀 쓰게 하고.....뭐 여튼 그랬어요."

중간중간의 "죽여버린다"느니, "증거사진"이니, "각서"이니 하는 몇몇 단어가 유독 내 귀에 강렬하게 때려박혔다. 놀라운 사실은 유성이를 그래도 어느정도 파악하게 된 내 입장에서 짐작하건대, 이 서술 내용이 지금도 상당부분 생략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유성이가 저렇게 말을 어눌하게 할 리가 없으니.

도대체 뭘 어떻게 했다는 걸까?

"그리고 휴학하기 전에 성진 선배한테도 용서를 구하라고 했으니까... 아마 곧 사과를 하던지 할 거에요."

최대한 별 일이 아닌 것처럼 얘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과연 어떨지....
유성이가 무슨 수단을 써서 사과를 받아냈는지는 몰라도 절대 평범한 수단은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무튼, 그 얘기는 이제 하지 마요. 아마 이제 별 걱정 안해도 될 거에요. 사실 선배한텐 이야기하기 싫었는데, 선배는 알고 있어야하니까...."
"왜? 왜 이야기 하기 싫었는데?"

대답을 망설이던 유성이가 시선까지 피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폭력은.... 여성적인 거랑은 거리가 멀잖아요."
"......"

그 말 속에 내포된 의미를 비록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적어도 유성이가 내게 "여성적"으로 보이고 싶어한다는 마음 정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비록 방금 전까지의 대화 맥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유성이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선배."
"응."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되나요?"
"그러던가."

나는 속으로 과연 유성이가 지환이를 어떻게 했는지를 여러가지로 추측하고 있었기에, 너무도 담담한 말투로 날아오는 유성이의 질문에 대해 별 생각없이 대답을 뱉었다. 그러고 나서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는 데까지는 무려 1분이 걸렸다.

"아니, 잠깐. 방금 뭐라고?"
"자고 가도 되냐구요."
"무, 무슨 소리야? 갑자기?"
"집보다는 여기가 학교랑 더 가까워요. 내일 오전 수업 하나밖에 없는데 그거 때문에 집까지 굳이 왔다갔다 하기 싫어서 그래요."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안돼, 집에가."
"왜요? 방해 안되게 간이침대에서 잘게요."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냐."
"그럼 뭐가 문제에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여자애가 외박은 무슨 외박이야? 집에 들어가서 자야지!"

살다살다 내 입에서 이런 성인군자의 대사가 나올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여자애 입에서 내 옆에서 자고 가도 되냐는 말이 나올 거란 생각도 별로 안해봤다. 외모가 어떻든지 간에 여자 쪽에서 그런 말을 해온다면 쌍수 들고 옆에 이부자리까지 깔아줄 성격의 나인데, 하물며 유성이 정도 되는 애가 그런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도무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유성이의 아빠라도 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걸까?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내 말에 대한 유성이의 반응 또한 가관이었다.
유성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몰랐던 사실을 배웠다는 듯이 내게 되려 반문을 해온다.

"외박을 하는게 여자 답지 못한 행동인 거였어요?"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놀란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 같다는게 더 신기했다.
그런 유성이의 표정은 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여자가 되려면 외박을 하면 안되는 거군요... 그럼 할 수 없네요."
"아냐! 그런 뜻은 아니야."

마치 초등학교 도덕 선생님이 된 것 같은 그 이상한 기분을 또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런게 아니라 그냥... 집에서 걱정하실 테니까, 귀한 딸이 말도 없이 집에 안 들어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

나는 제대로 된 이유를 대겠답시고 생각나는 대로 갖다붙이다가, 아차 싶어서 말꼬리를 흐렸다.
바보 같이 그제서야 유성이의 집안사가 떠오른 것이었다. 느려터진 내 머리가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는데요...."

그 때 유성이의 그 한마디가 얼마나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는지 모른다.

슬퍼하는 표정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동정을 바라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했다.
다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쓸쓸함이 있었을 뿐.

단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할 뿐인 그 담담한 표정이 그렇게 마음 아플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해서 말을 했을 텐데.... 그래서 괜히 내가 더 미워졌다.

"유성아..."

유성이에겐 집에서 기다려 줄 가족이 없었다. 늦게 들어오거나 외박을 했을때 그녀의 신변을 걱정해 주어야 할 부모님은 야속하게도 딸아이를 한국땅에 혼자 두고 일본으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유성이가 내게 자신의 가족사를 이야기한 순간부터 그녀는 어쩌면 내가 자신의 그런 아픔과 쓸쓸함을 알아주기를 원했을 지도 모른다. 눈치 없이 그 부분을 몰라준 내가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선배가 불편하다면 그냥 갈게요."
"아, 아니야, 잠깐 기다려 봐."

어쩌면 "집"이라는 공간에 가는 것조차도 그녀에게 있어선 하나의 고역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유성이였지만 언제나 텅 빈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해주는 그 냉혹한 공간이 그녀에게 있어 안온한 보금자리일리는 없었다. 쓸쓸한 집안에 발을 들이면서 그녀는 매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여자애의 몸으로....

"그, 그래. 그냥 자고 가."
"왜요? 여자애는 외박을 하는게 아니랬잖아요."
"그딴 거랑 여자애 다운건 사실 아무 상관도 없어. 어차피 집에 가봤자 혼자일텐데 그냥 자고 가, 너만 안 불편하다면 나는 뭐 괜찮아..."

사실 괜찮은게 아니라 나로서는 상당히 가슴 설레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이 불편한 기분만 없다면 말이지만.

"그럼 그럴게요."
"대신 간이침대에서 자는건 안 돼. 네가 여기 이 침대에서 자고, 간이 침대에서는 내가 잘게."
"네? 그건 싫어요. 선배가 환자니까 그 침대에서 자야죠."
"말 들어. 안그럼 집에 보낼 거니까."

문득 유성이의 과거사를 듣기는 했지만, 그녀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쓰질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새삼 반성했다.

비록 얼굴도 모르지만 일본에 있는 유성이의 부모님이 갑자기 원망스러워졌다. 스무살의 딸애를 혼자 두고 그렇게 가버릴 만큼 그 가문의 중대사라는게 그렇게나 중요했던 걸까? 아무리 후계를 잇는다는 것이 의미가 무겁다고는 하지만, 유성이는 고작 스무살 여자애일 뿐인데....

그녀가 무예의 피를 이어 받은 강인한 여자라고는 해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사람이라면 그 나이에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술이니, 계승이니 하는 그 쪽의 세계에 대해 전혀 무지한 나로서는 그저 유성이를 이렇게 홀로 내버려둔 그녀의 가족, 그녀의 가문이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오늘은 간이침대에서 자야겠다 싶어 세탁실에서 여분의 이불이라도 들고 오려고 나가려는데, 등 뒤에서 유성이가 문득 그런 말을 했다. 돌아본 그녀의 표정이 정말로 순수하게 고마워하는 것 같아서, 나는 또 괜히 마음이 시큰해졌다.

"고맙긴."

물론 멋쩍기도 했다.


*


유성이는 침대에 눕는 순간까지도 그 슈트를 벗지 않았다. 물론 보는 입장에선 섹시하고 좋긴 한데, 아무래도 잘 때는 좀 갑갑하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유성아, 그거 입고 자는거 안 불편해?"
"편하진 않은데 어쩔 수 없어요."
"왜?"
"이거 안에 아무 것도 안 입었으니까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럼 저 매끈한 슈트 안에 알몸이 있단 말인가?
순간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현아 씨가 떠올랐다. 아예 대놓고 대담한 노출을 하는 현아 씨와 유성이를 결코 비교할 순 없었지만, 유성이의 슈트 안이 정말로 알몸이라면 그것 또한 그것 나름대로 대단한 노출이라 할 수 있었다.

"화, 환자복 남는거라도 있는지 물어볼까?"
"됐어요. 그게 더 불편할 것 같아요."

유성이가 뭐라고 지적한 것도 아닌데 괜히 내가 야한 생각을 했다는걸 유성이에게 읽힐까봐 조마조마했다.
숨기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별 시덥잖은 농담을 던져봤다. 비록 던지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지만 말이다.

"그럼 그냥 벗고 잘래? 어차피 우리 서로 알몸도 봤는데."
"......."
"노, 농담이야. 웃기고 싶어서."

기집애. 암만 그래도 그렇게 정색을 하다니.

"잘 자, 유성아."
"네."

조금은 쑥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병실 불을 껐다. 아늑한 어둠이 내려앉았고, 또 그만큼 고요한 정적이 병실 안을 메웠다. 결국 유성이를 편안한 위쪽 침대에 눕히고 나는 간이 침대에 대충 이불을 깔고 누웠다. 아래 위로 나뉘어져 나는 유성이의 누워있는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침대 난간에 살짝 걸쳐져 있는 유성이의 오른팔은 빼꼼히 보이고 있었다.

잘 자라는 인사를 하긴 했지만 글쎄, 잠이 오긴 올까....

가슴이 이상하리만치 싱숭생숭거렸다. 내 마음을 나조차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긴 했지만 단순히 여자가 옆에 누워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뭘까, 이 생소한 기분은....

신기하게도 나는 중,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찌질했던 시기였지만 적어도 돌이켜보면 그 때의 나에겐 순수라는게 있었다. 여자를 볼 때 지금처럼 섹스부터 떠올리지도 않았고, 비록 어설프기 짝이 없는 풋사랑이었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어 남몰래 마음 졸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 내가 그 때의 감각을 회상하고 있는 걸까?

"달 한번 참 밝구나."

하지만 달은 그저 잡생각을 잊지 위한 하나의 허상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달빛은 이 싱숭생숭한 기분을 가라앉히는데 별 도움을 주진 못했다. 침대 위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유성이의 숨소리에 청각이 곤두섰다.

유성이는 자고 있는걸까? 문득 낮에 서연이와 저 침대 위에서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롤모델로 삼고 있는 언니가 바로 지금 자기가 누워있는 침대 위에서 나와 뜨겁게 뒹굴었다는 사실을 알면 유성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상상을 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짜릿했지만, 한편으로는 아까 세탁실에서 받은 것으로 침대보를 교체한 덕분에 유성이가 그 사실을 알 수 없다는게 다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유성이는 현아 씨처럼 정액 냄새를 맡는다고 해서 곧장 뭔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30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유성이가 자고 있는지 굳이 일어나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얌전히 누워 있는 유성이의 모습을 보고 나면 괜히 더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선배."

그래서 그녀가 먼저 나를 불렀을 때 나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응."
"자나요?"
"아니."
"왜 안 자요?"
"그냥 잠이 안 와서. 너는?"
"저도요."

그러고 나서 또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순정소설 같은데서 보면 보통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부끄럼을 무릅쓰고 남자에게 올라와서 같이 자자고 말하기도 하던데, 혹시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

"올라와서 같이 잘래요?"
"......."

세상에. 진짜 일어나네.

"그... 럴까?"

거절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을까? 하지만 바보 같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세번 정도는 튕기고 올라가야 그래도 덜 어색할거란 사실 쯤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유성이의 물음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 입은 저절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기껏 남자답게 편한 침대를 내어줬는데 줏대없이 유성이가 한 마디 했다고 덥썩 그러자, 하며 기어올라가는 내 모습이 한심해 보일 거라는 것도 내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체면을 세우겠다고 "아니. 여기서 잘게" 했다간 "그럼 그러세요" 하는 유성이의 담담한 대답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건 역시 나도 내심으론 유성이의 옆에서 자고 싶었던 거겠지?

"비... 좁진 않으려나?"
"그 때 보단 덜 비좁을 것 같은데요."
"그, 그 땐 껴안고 있었을 때였잖아."

굳이 그 순간의 느낌을 되새기도록 유도하는 유성이가 왠지 얄밉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무슨 악의가 있었겠냐만은 내 입장에선 솔직히 그 때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그 때의 흥분까지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옆에 누워 자자고 해놓고 그런 감각을 떠올리게끔 만들어 버리면, 남자 입장에서 난감한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어기적거리며 어떻게든 그 좁은 1인용 침대에 둘이 눕기는 누웠다. 물론 그 때처럼 껴안거나 할 수는 없었기에 애매한 차렷 자세로 바깥 쪽에 뻣뻣하게 누웠다. 혹시라도 침대 밑으로 떨어질 경우를 생각해 유성이는 안전한 벽쪽으로 들어가게끔 해주었다.

차라리 서연이나 현주였다면 편하게 몸을 접촉하거나, 끌어안거나 하기라도 했을 텐데 상대가 유성이다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세가 무척 불편해졌다. 유성이는 그 때보다 덜 비좁을 것 같다고 말했지만 자세가 불편하다보니 나는 체감상 그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비좁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선배."
"응."
"불편해요?"
"아, 아니."

그래도 내가 불편해하고 있다는걸 느끼긴 느끼나 보다.
그 당연한걸 굳이 물어오는 유성이도 어지간히 별난 애였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도 다시 내려가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는 나도 참 여간 속 보이는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분이 이상했다. 단순히 성욕에 들뜨는건 아니었다. 이 싱숭생숭함은 대체 무엇이며, 가슴은 또 왜 이리 빠르게 뛰는 걸까?

"유성아."
"네."

어차피 유성이도 그리 잠을 자고 싶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기묘한 이끌림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대화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마음은 유성이와의 대화를 원하고 있었다.

"계곡에서 내가 너한테 키스 했던거 말이야...."
"......"
"진짜 첫 키스였어?"

많고 많은 질문 중에 왜 하필 그걸 물어봤을까?
글쎄.... 그만큼 그게 궁금했나보지. 여러 가지 목소리가 마음 속에서 혼잡하게 뒤섞였다.

"그건 왜 물으세요?"
"그냥 신기해서... 여태까지 남자친구는 없었어?"
"글쎄요, 어릴 때 아버지 도장에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은 다 남자였는데요."
"......."

이건 일부러 나를 갖고 노는 거겠지?

"그런거 말고. 사귀었던 남자는 없었냐구."
"사귈 수가 없었어요."
"왜?"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남자를 사귀나요?"

그 순간 유성이의 대답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동정심이나 안쓰러움 같은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열망이었다. 어떤 기묘한 열망. 하지만 그걸 내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남자친구... 한번 사귀어 봐. 내가 보기에 너 괜찮은 여자애야. 남자친구 사귀어서 연애도 하고, 사랑도 받고.... 그러다 보면 굳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네가 한 명의 여자라는걸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도 가끔 그런 말을 하긴 했던 것 같아요... 예전에."

그것은 내가 느낀 바를 솔직하게 표현한 말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 진심을 감추고 에둘러 표현한 마음에 없는 소리이기도 했다. 유성이가 여자로서의 행복을 찾기 위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겠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유성이가 어떤 남자의 품에 안겨 행복한 웃음을 짓는 모습을 상상하니 뭔가 기분이 배배 꼬이는 느낌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누구랑요?"

게다가 유성이가 던진 질문은 내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놓는다.

"응?"
"누구랑 사귀냐구요. 연애가 혼자 하는건 아니잖아요."
"으음, 글쎄...."

그 순간 나는 마음 속으로 내 자신을 욕했다. 이미 현주가 있으면서도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 라는 대답을 내뱉고 싶은 충동을 잠시나마 느낀 내가 너무도 한심하고 혐오스러웠다. 현주가 이런 내 마음을 안다면 기겁을 하겠지. 아마 나를 쓰레기라고 경멸할 지도 몰라.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인간은 왜 이렇게 솔직한 동물인걸까? 윤리나 도덕, 심지어는 그 외의 그 어떤 기준을 들이대서 생각하더라도 지금 내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걸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럴 수록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현주랑 어떻게 만났더라?
그래, 처음엔 현주의 예쁜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들이댔었지.
요새는 다 그렇게 시작하잖아. 이상한 것도 아니라구.

그러면 유성이의 경우는 뭔가 다른가?
내가 유성이를 알아봤자 얼마나 안다고. 과거사를 들었다고 해서 내가 그녀의 내면까지 알고 있는건 아니잖아.
유성이한테도 그냥 외모에 이끌려서 이러는 것 뿐인거 아니야?

"현주랑 시작할 때도 내가 이런 마음이었나?"

젠장,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최성진.
현주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지금 이 따위 비교나 하고 있는 꼴이라니....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혹시 선배랑요?"

하지만 유성이는 정말 야속하게도 내 이런 혼란스런 마음에 완전한 균열을 내버렸다.
이런 경멸스런 비교는 그만하자고 속으로 되뇌고 있었지만, 유성이의 그 직접적인 질문 앞에 내 입은 나도 모르게 이보다 더 속물적일 수는 없을거라 여겨지는 짧은 한마디를 대답이랍시고 내뱉고 있었다.

"응."

어쩌면 난 정말 쓰레기일지도 몰라.
솔직한 쓰레기.

"선배는...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 와중에도 유성이의 입에서 "싫어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음에 안심하고 있는 나는 정말로 솔직했지만, 또 한편으론 정말로 경멸스러웠다.

"응. 맞아."
"......."
"그런데, 너랑 사귀는 생각을 하니까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았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솔직한 마음이 입 밖에까지 나와버린 것 같아...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기분 나쁜건 아니었어요."

부끄럽다. 남자친구 한번 사귀어보지 않은, 게다가 어쩌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고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어쩌면 지금 유성이가 하고 있는 그 고민은 앞으로 남은 그녀의 "여자로서의" 삶을 좌지우지하게 될 지도 모르는 중요한 고뇌의 과정일 것이다. 그 무게가 그녀의 삶에 있어 어느 정도의 의미를 차지할지는 내가 굳이 그녀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실감을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거기에 지금 나 같은 놈의 난잡한 상황을 굳이 끼워넣으려는게 과연 옳은 걸까?
그게 아무리 솔직한 마음의 표현이더라도....

"미안해. 그냥 못 들은걸로 해줘."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한 말이었다.
한번 뱉은 말을 어떻게 다시 못 들은 걸로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 말고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

유성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그 이후로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새벽이 깊어질 무렵 그래도 어떻게 잠이 들기는 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병실 안에는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이 되니, 유성이는 이미 가고 없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매번 느끼지만 소라에 글을 쓰는게 하나의 활력소가 되네요
다른 말이 뭐가 필요할까요 ^^

즐거운 금요일입니다. 월요병을 느꼈던 것도 불과 어제 일 같은데 또 주말이 다가오네요.
다들 힘을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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